열에 아홉이 밭에 있었다
역사의 대부분 동안 '직업'이라는 말은 거의 필요가 없었다. 산업화 이전의 세계 어디를 잘라 보아도, 인구의 압도적 다수 — 대략 열에 아홉 — 는 땅에 매여 있었다. 농사는 여러 직업 중 하나가 아니라 인간 노동의 기본값이었고, 왕과 사제와 장인과 상인, 즉 나머지 모든 일은 그 기본값 위에 얹힌 얇은 지붕이었다. 한 사회가 밭 바깥에 몇 사람을 세워 둘 수 있는가 — 문명의 크기는 사실상 그 숫자로 정해졌다.
그 기본값은 오래된 것이었다. 기원전 4천년기 메소포타미아에서 쟁기가 경운을 사람의 등에서 소의 어깨로 옮긴 뒤, 한 사람이 부릴 수 있는 경작 면적은 몇 배로 늘었고 잉여 곡물과 도시가 그 뒤를 따라왔다. 그러나 그 도시들조차 농민의 바다 위에 뜬 섬이었다. 쟁기는 힘의 출처를 옮겼을 뿐, 사람을 밭에서 내보내지는 못했다. 밭은 여전히 계절마다 사람의 손을 불렀고, 그중에서도 가장 급하게 부르는 손은 수확철의 손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 손이 어떻게 하나씩 기계로 넘어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허리의 역사
수확은 만 년 가까이 허리의 노동이었다. 신석기의 낫은 이삭을 하나하나 손으로 훑던 채집식 수확을 끝내고, 부싯돌 날 하나로 곡식을 한 움큼씩 끊게 해 주었다. 수확이라는 노동 자체를 발명한 도구였고, 이후 만 년 동안 등장한 모든 수확 기계는 이 굽은 날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수확자는 쪼그려 앉거나 허리를 굽힌 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중세 유럽의 대낫은 긴 자루와 긴 날로 그 자세부터 바꿨다. 선 채로 긴 호를 그리며 베는 동작은 낫보다 수 배 빨랐고, 도구의 역사에서 드물게 속도만큼 몸의 고통을 줄인 개량이었다. 허리를 펴게 한 것, 그 자체가 혁신이었다.
그래도 한계는 그대로였다. 밀은 대낫을 쥔 사람의 수만큼만 베어졌다. 수확철이면 밭마다 사람들이 늘어서서 날을 휘둘렀고, 한 농가가 지을 수 있는 밀밭의 크기는 결국 그 몇 주 동안 모을 수 있는 손의 수로 정해졌다. 곡물은 익으면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을 놓치면 한 해가 밭에서 썩었다.
기계가 넘겨받은 두 계절
그 조바심이 시장이 되었다. 1831년 미국에서 매코믹의 수확기가 등장하자, 말이 끄는 기계 한 대가 낫잡이 여러 명의 몫을 감당했다. 낫과 대낫의 직계 후손이지만, 이번에는 날을 휘두르는 것이 사람의 팔이 아니었다. 일 년 중 가장 급한 노동이 기계로 넘어가면서 수확철의 인력 병목이 풀렸고, 한 가족이 지을 수 있는 밀밭의 상한 자체가 움직였다. 밭의 크기를 정하던 것이 더 이상 사람의 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수확 다음의 계절은 그보다 먼저 기계에 넘어가 있었다. 곡물과 짚을 가르는 도리깨질은 수확 자체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헛간에서 겨우내 이어지는 그 단조로운 타작은 농한기 노동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많은 농촌 일꾼에게는 겨울을 나게 해 주는 유일한 품삯이기도 했다. 1786년 스코틀랜드에서 앤드루 마이클의 탈곡용 회전 드럼, 곧 탈곡기가 그 몇 달치 도리깨질을 며칠의 기계 작업으로 압축했다. 대신 농촌의 겨울 일자리가 지워졌고, 이 기계는 기계가 일으킨 최초의 농민 소요들의 표적이 되었다. 일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가 처음으로 사회적 질문이 된 순간이었다 — 그리고 그 질문은 이후 모든 기계의 등장마다 되돌아온다.
세 노동을 삼킨 한 대
다음 단계는 통합이었다. 베어 낸 곡식은 털어야 하고, 턴 곡식은 겨와 갈라야 한다. 낫질(수확)·도리깨질(탈곡)·키질(선별) — 수확기의 세 노동은 만 년 동안 각각 다른 도구, 다른 계절, 다른 손을 요구했다. 이름부터 '결합'인 콤바인은 그 세 가지 수작업을 한 대의 기계 안에 흡수했다. 19세기에 시작된 이 기계의 행렬이 곡창지대를 한 번 지나가면, 예전 같으면 마을 하나가 달라붙어야 했던 세 계절 치의 노동이 그 뒤에서 끝나 있었다. 콤바인은 곡창지대의 풍경만이 아니라 인구 지도를 다시 그렸다 — 농업 인구 비중이 90%대에서 2% 이하로 떨어지는 긴 곡선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까지 해고한 기계
마지막 조각은 힘 그 자체였다. 20세기 초 미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트랙터가 대체한 것은 역축을 부리는 노동만이 아니었다. 그 역축을 먹이고, 돌보고, 먹이 작물을 심고 거두던 노동 전체였다. 말은 쉬는 날에도 먹는다 — 그래서 농장의 일부는 언제나 시장이 아니라 마구간을 위해 경작되고 있었다. 1910년대 미국의 말과 노새는 2천만 마리를 넘었지만 트랙터 보급과 함께 급감했고, 먹이 재배에 묶여 있던 광대한 경지가 사람의 식량 생산으로 풀려났다. 쟁기가 노동을 소에게 넘겼다면, 트랙터는 그 소마저 해고했다. 먹이지 않아도 되는 힘은 농장의 계산법 자체를 바꿨다.
그렇게 이백 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중은 USDA 통계로 2%를 밑돈다. 백 명 가운데 두 명이 나머지 아흔여덟 명의 식탁을 차리는 셈이다. 이것은 어떤 정복이나 혁명보다 조용하게 진행된, 그러나 아마 더 근본적인 인구 이동이었다. 낫에서 콤바인까지, 이 축의 기계들은 하나같이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밭'의 상한을 밀어 올렸고, 그 상한이 오를 때마다 밭에 필요한 사람의 수는 내려갔다. 열에 아홉이 서 있던 밭에 이제 백에 둘이 서 있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곳으로 갔다. 그렇다면 사라진 농부들은 어디로 갔는가 — 그들 중 많은 수가 처음 줄을 선 곳이 바로 조립라인 앞이었고,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