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손보다 잇는 손이 많았다
배 한 척은 한 덩어리로 태어나지 않는다. 압연기에서 나온 강판을 자르고 구부려도 그것은 아직 조각일 뿐이다. 조각과 조각을 이어야 선체가 되고, 철골 기둥과 보를 잇고 또 이어야 건물이 된다. 만들기의 역사에서 자주 잊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물건은 부품을 만드는 노동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부품을 잇는 노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품 하나하나가 아무리 빨리 나와도 이음이 느리면 전체가 느리다.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쇠와 쇠를 잇는 표준 답은 하나였다. 리벳.
달군 리벳을 던지는 소년
리벳 이음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화덕 옆의 소년이 리벳을 벌겋게 달군다. 알맞게 달았다 싶으면 집게로 집어 허공으로 던진다. 발판 위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받이통으로 그 불덩이를 받아, 집게로 집어 구멍에 꽂는다. 판 뒤에서는 또 한 사람이 무거운 받침쇠로 리벳 머리를 받쳐 누르고, 앞에서는 리베터가 해머를 내리쳐 반대쪽에 새 머리를 만든다. 던지는 사람, 받는 사람, 받치는 사람, 박는 사람 — 리벳 하나가 박히는 데 한 팀이 필요했고, 배 한 척, 다리 하나에는 그런 리벳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들어갔다. 품삯을 박아 넣은 리벳의 개수로 셈하는 현장도 흔했으니, 팀의 손발이 맞는 정도가 곧 그날의 벌이였다. 던짐이 짧거나 받음이 늦으면 리벳은 식고, 식은 리벳은 화덕으로 되돌아간다. 네 사람의 박자가 곧 이음의 품질이자 속도였던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판을 겹쳐야 했다. 맞댄 판은 리벳으로 이을 수 없으니, 판과 판을 포개고 구멍을 뚫고 구멍과 구멍을 맞춘다. 그래서 리벳의 이음은 눈에 보였다. 겹쳐진 판의 단차, 줄지어 박힌 리벳 머리들. 조선소와 철골 현장은 해머 소리가 그치지 않는 소리의 공간이었고, 그 소리 하나하나가 곧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는 한 팀의 존재 증명이었다.
불빛 하나로 잇다
19세기 말, 전기 아크가 쇠를 녹일 만큼 뜨겁다는 사실이 기계가 되었다. 용접기다. 원리는 리벳과 정반대다. 리벳이 두 판을 겹쳐 놓고 제3의 쇠붙이로 죄어 붙이는 것이라면, 용접은 판과 판을 맞대어 경계 자체를 녹인다. 식고 나면 두 판은 이어진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 겹침판이 필요 없고, 구멍이 필요 없고, 리벳이 필요 없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녹았다 굳은 자리가 정말 한 몸이 되었는지는 겉에서 보이지 않아서, 이음선의 신뢰는 용접공의 손끝과 새로 생겨난 검사의 눈에 맡겨졌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조선과 건축의 접합 공법은 리벳에서 용접으로 넘어갔다. 겹침판과 리벳이 사라진 만큼 선체는 가벼워졌고, 매끈해진 이음선은 물살에도 유리했다. 노동의 풍경은 더 크게 바뀌었다. 불덩이를 주고받던 네 개의 자리가 사라지고, 차광면을 쓴 용접공 한 사람이 불빛 앞에 남았다. 소리의 공간이 불빛의 공간이 된 것이다. 리벳 팀의 기예 — 정확히 던지고 정확히 받는, 서로의 박자를 아는 몸들 — 는 물려줄 곳 없이 풍경째 사라졌다. 이음매를 없애는 기술은, 이음매를 만들던 노동도 함께 지웠다. 물론 노동이 통째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차광면 뒤에는 아크의 길이와 나아가는 속도를 손목으로 재는 새로운 숙련이 생겨났다. 다만 그것은 팀의 기예가 아니라 한 사람의 기예였다.
거푸집의 사천 년이 도달한 곳
잇는 노동을 줄이는 더 급진적인 길이 있다. 처음부터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발상 자체는 새것이 아니다. 청동기 시대의 거푸집이 이미 그랬다. 녹인 금속을 틀에 부으면 형태가 통째로 나온다. 프레스가 수십 번의 망치질을 일격으로 접었듯, 거푸집은 만들고 잇는 여러 공정을 부음 한 번으로 접었다. 다만 수천 년 동안 이 방법에는 꼬리가 붙어 있었다. 부어 낸 것은 아직 끝난 물건이 아니어서, 깎고 다듬고 갈아야 했다. 쇳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틀에서 떼어 내고 탕도를 잘라 내는 손도 여전히 필요했다.
1872년 하이엇 형제가 셀룰로이드를 틀에 쏘아 넣는 기계로 특허를 받았고, 이 계보가 20세기의 플라스틱과 만나 사출성형기가 되었다. 녹인 플라스틱을 닫힌 금형에 쏘아 넣으면, 수십 초 안에 마무리가 거의 필요 없는 완제품 형상이 나온다. 거푸집이 사천 년 걸어온 길의 현재 끝이 여기다. 그리고 사출은 이음의 문제에도 답을 냈다. 여러 부품으로 만들어 조립해야 했을 형태를 아예 한 몸으로 찍는 것이다. 뚜껑과 몸통이 얇은 플라스틱 관절로 이어진 채 통째로 나오는 물건을 우리는 매일 연다. 이을 필요가 없으니, 잇는 노동도 없다. 금형 하나를 만드는 데는 여전히 공작기계와 사람의 정성이 들지만, 일단 만들어진 금형은 같은 형태를 지치지 않고 되풀이한다. 형태를 만드는 노동이 공정의 맨 앞으로 당겨져, 틀 속에 저장된 것이다.
이음매가 사라질수록
리벳 머리가 줄지어 박힌 오래된 철교 아래에 서면, 우리는 노동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저 머리 하나마다 던지고 받고 받치고 박은 한 팀의 순간이 있다. 용접된 선체의 매끈한 이음선에서는 그것이 읽히지 않고, 사출된 플라스틱 물건에서는 이음매 자체를 찾을 수 없다. 물건이 매끈해질수록, 그것을 잇던 손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그 매끈함을 품질이라 부르고,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그 품질의 다른 이름이 '사람 손이 덜 간 물건'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할 일이다.
이 이야기는 같은 회에서 다룬 줄과 바이스의 이야기와 뿌리를 나눈다. 줄질이 '딱 맞음'을 손으로 만드는 노동이었다면, 리벳은 '이어짐'을 손으로 만드는 노동이었다 — 그리고 둘 다, 더 정밀한 기계 앞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 맞춤이 규격 속으로 사라졌듯 이음매는 용접선과 금형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문장은 하나다. 이음매가 사라질수록, 그 자리에 서 있던 노동도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