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계의 역사, 작은 노동의 역사
가사 노동의 해방사는 대개 큰 기계들의 연대기로 쓰인다. 세탁기가 빨래판 앞의 하루를 가져갔고, 냉장고가 매일의 장보기와 절임 항아리와 얼음 배달부를 한꺼번에 치웠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연대기에는 그늘이 있다. 큰 기계들이 큰 덩어리의 노동을 걷어 간 뒤에도, 밥상 주위에는 이름조차 붙지 않은 작은 노동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운 날 밥상 곁에서 부채를 젓는 일. 마늘을 다지고 생강을 갈고 삶은 것을 으깨는 일. 남은 국 한 냄비를 데우려 다시 불 앞을 지키는 일. 하나하나는 몇 분짜리 일이지만, 끼니마다 계절마다 돌아왔고, 대개 같은 사람의 몫이었다. 노동사의 기록은 이런 일들을 잘 잡아내지 못한다. 하루 단위로는 너무 작고, 이름이 없어 장부에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 작은 노동들을 지운 작은 기계들의 역사다.
바람을 만드는 노동
시원함을 만드는 것도 노동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힌다. 부채는 제 몸을 식히는 도구였지만, 동시에 남을 식히는 노동이기도 했다. 병자의 머리맡에서, 상전의 밥상 곁에서, 부채를 젓는 일은 흔히 하인과 아이의 몫이었다. 식민지 시대 인도의 저택에는 천장에 매단 큰 부채를 줄로 당기는 일만 전담하는 하인까지 있었다 — 바람 한 줄기를 위해 사람 하나의 팔이 하루 종일 움직였던 것이다. 밥상 앞의 시원함이란 곧 밥상 뒤의 누군가의 팔놀림이었다. 전기 이전에도 태엽을 감거나 손잡이를 돌리는 기계 부채가 시도되었지만, 동력이 사람의 몸인 한 노동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1880년대 초 미국에서 전기 선풍기가 등장하면서 바람은 근육에서 모터로 옮겨 갔다. 전동기가 가정에 들어와 처음 맡은 일 가운데 하나가 하필 부채질이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그 노동의 무게를 증언한다. 사람들은 새 동력을 얻자마자 가장 먼저 팔에서 내려놓고 싶은 일부터 기계에 넘겼다. 시원함은 이제 누군가의 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위치에서 나온다. 부채를 젓던 아이의 자리는 조용히 비었고, 아무도 그 노동의 소멸을 기념하지 않았다. 선풍기가 20세기를 지나며 사무실과 공장과 무더운 여름의 안방으로 퍼져 나가는 동안, 부채는 바람을 만드는 도구에서 더위를 견디는 정취의 소품으로 물러났다.
손목이 하던 일
부엌 쪽의 작은 노동은 손목에 몰려 있었다. 절구에 찧고, 강판에 갈고, 체에 내리는 일 — 퓌레 한 그릇, 소스 한 종지, 양념 한 숟갈의 뒤에는 언제나 이 손목의 시간이 붙어 있었다. 요리책은 "곱게 갈아서"라고 한 줄로 적지만, 그 한 줄이 실제로는 절구공이를 쥔 십수 분이었고, 강판에 손가락을 스치는 위험이었다.
1922년 스티븐 포플라프스키가 소다수 가게의 음료를 젓기 위해 용기 바닥에 회전 칼날을 단 드링크 믹서를 만들었을 때, 그것은 부엌의 도구가 아니라 가게의 설비였다. 1930년대 후반, 악단 지휘자 프레드 웨어링의 이름을 단 개량형이 나와 과일과 채소를 통째로 가는 모습을 선보이면서, 이 기계는 상점의 설비에서 가정의 물건이 되기 시작했다. 회전 칼날이 가정 부엌으로 들어오자, 다지고 갈고 으깨던 세 가지 동작이 모터 하나로 접혔다. 원리 자체는 새것이 아니다. 회전이 왕복하는 몸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기원전의 맷돌이 곡물로 이미 증명한 일이다. 믹서는 그 오래된 원리를 곡물 너머 부엌의 거의 모든 재료로 넓힌 20세기판이었다. 맷돌에서 믹서까지 — 위짝을 돌리던 손과 버튼을 누르는 손 사이에는 이천 년이 있지만, 두 도구가 덜어낸 것은 같은 자리, 같은 손목의 노동이다. 도구는 바뀌어도, 덜어야 할 자리는 이천 년 동안 같았던 셈이다.
마지막 구간
큰 기계와 작은 기계의 관계는 교대에 가깝다. 냉장고가 보존이라는 큰 노동을 가져간 뒤에도, '남은 것을 다시 먹을 만하게 만드는' 일은 남아 있었다. 그 잔여를 지운 것이 전자레인지다. 오븐을 예열하고 냄비를 지키던 수십 분의 데우기가 수 분으로 줄자, 조리의 마지막 남은 노동이 목록에서 빠졌다. 냉장고가 열어 둔 문장을 전자레인지가 닫은 셈이다.
여기에는 눈여겨볼 차이가 하나 있다. 루스 슈워츠 코완이 '어머니에게 더 많은 일을'이라는 역설로 보여 줬듯, 큰 기계는 종종 기준을 함께 끌어올렸다. 세탁이 쉬워지자 더 자주 빨게 되었고, 청소가 쉬워지자 더 깨끗해야 했다 — 덜어낸 노동의 일부가 높아진 기대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작은 기계들이 지운 노동은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았다. 선풍기가 생겼다고 부채질을 더 자주 할 이유가 없고, 믹서가 있다고 으깨기의 기준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작은 기계들의 해방이 조용했지만 온전했던 이유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가사 노동의 해방은 큰 기계가 큰 덩어리를 가져가며 시작됐지만, 끝난 것은 작은 기계들이 잔여를 마저 지우면서였다. 세탁기와 냉장고는 하루와 계절을 바꿨고, 선풍기와 믹서와 전자레인지는 그 사이에 낀 몇 분들 — 부채질, 절구질, 데우기 — 을 걷어 갔다. 몇 분짜리 노동이라고 가볍지 않다. 매일 돌아오는 몇 분은 평생으로 곱하면 몇 해가 되고, 그 몇 분이 늘 같은 사람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해방을 세는 단위는 시간만이 아니다. 그 시간이 누구의 것이었는가도 함께 세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같은 회차의 정미소 이야기와 한 뿌리에서 나왔다 — 밥상 앞의 기계. 절구질이 마을 단위에서는 정미소의 모터로 걷혀 나갔다면, 집 안에서는 믹서의 칼날과 선풍기의 날개가 그 잔여를 지웠다. 규모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밥상 곁에서, 사람의 몸이 하던 마지막 몇 분을 모터가 이어받은 것이다.